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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유럽

1502 서유럽 패키지 2일: 루브르 박물관 2

2015. 3. 15. 댓글 ​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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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루브르 박물관 안으로 입장했다.

 

 우리는 오른쪽으로 이동.

이탈리아 그림/ 이탈리아 조각/ 그리스 유물

 

 많은 조각상들을 지나고...

 

처음 만나는 작품은 카노바 <프시케와 큐피드>

이 작품은 큐디드가 영면에 빠진 프시케를 찾아온 순간을 담았다고 한다.

프시케와 큐피드의 애절한 사랑을 잘 표현한 작품인 것 같다.

 

 잠시 작품 설명을 듣고 다음 작품으로 이동.

 

 미켈란젤로의 작품 두개.

왼쪽은 <반항하는 노예>, 오른쪽은 <죽어가는 노예>

 

 먼저 <죽어가는 노예>의 앞면.

죽어가는 노예의 얼굴은 너무나 편안해 보인다.

 

<죽어가는 노예>의 뒷면.

원숭이가 죽어가는 노예를 붙잡고 있다.

원숭이를 뒤에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반항하는 노예>

팔을 뒤로해서 역동적인 면을 강조하려 했나보다.

 

반항하는 노예의 뒷면은 미완성인 채로.

일부러 미완성으로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미켈란젤로의 두 작품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낭만주의 방'으로 입장 하였다.

 

이 작품은 뭔지?

검색을 해 보니 들라크루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4차 십자군 원정대가 1204년 4월 12일 군마를 타고

대대적으로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는 역사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 원래 이집트 원정을 목표로 출정했던 4차 십자군이 베네치아의 농간과 세속적 야욕에 의해 같은 기독교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약탈하게 된 것이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4차 십자군은 플랑드르 백작 보드앵 1세를 황제로 선출하고 콘스탄티노플에

라틴제국(1204-1261)을 세운다.

이제 비잔틴 제국은 니케아 제국, 트라페주스 제국, 에페이로스 공국이라는 망명 정권을 만든다.

결국 1261년 니케아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고 비잔틴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 그림에서는 군마를 타고 점령 도시로 입성하는 정복자들의 빛나는 영광보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와

약탈과 살육의 흔적들, 그리고 피정복민들의 절망과 무력감이 더욱 두드러지게 묘사되었다고 한다.

 

 폴 들라로슈 <알프스 산맥을 건너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알프스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를 침공하는데,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공격한 것에서 모티브를  따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나폴레옹 사후에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매우 현실적으로 그렸다고 한다.

 

* 1810년 나폴레옹 시대의 유럽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로스의 죽음>

 

* 1821년 G. 바이런은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사르다팔로스의 몰락을 주제로 한 시극 <사르다나팔로스>를

썼는데, 들라 크루아는 이 시극에 감동 받아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아시리아의 왕 사르다팔로스가 적들이 궁전에 난입하기 전, 사랑하던 애첩과 애마를 죽이고 보물을 한데 모아

불사르고 자신도 불타 죽었다는 비극적 장면을 상상으로 극대화하여 환상적으로 그렸다고 한다.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왕정복고에 반대하던 시민들이 부르봉 왕가를 몰아낸 역사적 사건, 7월 혁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고 한다.

중앙에 있는 여인은 잔다르크가 아니라 여신 '마리안느'라고 한다.

마리안느는 1789년 프랑스 혁명기에 프랑스, 자유, 평등, 공화정, 민중, 투쟁 등을 복합적으로 상징하는 표상으로

등장한 여인상이라고 한다.

1886년 프랑스 국민이 미국에 기증한 '자유의 여신상'도 마리안느의 분신이라고 한다.

 

 미술 문외한인 나도 많이 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여신 마리안느는 너무나 평범한 외모의 시민 여성을 그린 걸로 생각된다.

혁명은 항상 너무나 평범한 시민들의 몫이니깐.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 1816년 7월 2일 세네갈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떠난 해군 군함 메두사 호가 난파했다. 선장과 상급 선원,

일부 승객은 여섯 개의 구명 보트를 타고 대피했지만, 나머지 149명의 선원과 승객은 뗏목을 만들어 탈 수

밖에 없었다.

 13일 동안 물도 식량도 없이 표류한 이들의 뗏목은 죽음과 질병, 폭동과 광기, 기아와 탈수, 식인의

생지옥이 되었다. 구조될 때까지 살아 남은 이는 15명에 불과했는데 이후 이 사건은 국가적인 스캔들이 되었다. 

<메두사 호의 뗏목>은 생존자들이 13일간의 표류 뒤에 수평선 멀리 구조선을 발견하는 순간을 묘사했다고 한다.

 

장 그로 <아이라우 전투의 나폴레옹1세>

 

* 1807년 2월 폴란드의 아이라우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는 4만 명의 희생자가 나온 가운데

러시아에게 승리했다.

같은 해에 나폴레옹은 이 역사적인 사실을 길이 기념하기 위해 공모전을 개최하도록 하였다.

공모 내용은...

'아이라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날 전쟁터를 시찰하는 황제는 그 끔찍한 광경에 연민을 느낀다.

그는 부상당한 러시아 병사들을 간호하게 하였고 그들은 황제의 인간미에 감격한다.' 이었다고 한다.

이 공모전의 1등 당선 작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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