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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동유럽, 발칸

1602 동유럽, 발칸 패키지 5일: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1)

2016. 3. 23. 댓글 ​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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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월 9일, 여행 5일째이다.

 

오늘의 일정은...

두브로브니크로 이동-> 두브로브니크 관광-> 포세다르예로 이동, 호텔 투숙

이다.

이번 여행의 하일라이트 아드리아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 관광만 하루 종일 하는 날이다.

날씨가 좋기를 기대하고 기대해 본다.

 

* 아일랜드의 극작가이자 소설가로서 1925년 노벨 문학상을 수여받은 버나드 쇼가 1929년 이곳을

방문한 후 그 아름다움에 감탄해 "만약 지상의 낙원을 보고 싶다면 두브로브니크로 오라" 고 극찬했다고 한다.

 

* 두브로브니크의 간단 역사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돌섬에 불과했던 두브로브니크는 7세기경 슬라브족의 침공을 피해 달아나던

로마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13세기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갔다가, 15세기 서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개무역으로

부를 축적해 베니스에 버금가는 독립된 도시국가로 성장했다.(-> 라구사 공화국)

16세기에 들어서는 신대륙과 신항로 개발로 지중해 무역이 쇠퇴하면서 침체를 겪다가, 1667년 대지진으로

인구의 1/5이 사망하고 아름답고 화려했던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는 슬픔을 겪었다.

그러나 대대적인 복원 사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췄고 이제는 중세의 문화를 간직한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명성을 얻고 있다.

 

 

* 라구사 공화국(1358-1807)

라구사 공화국은 현재 크로아티아의 역사적 지역인 달마티아에 14세기부터 1808년까지 이어졌던

작은 공화국이다.

수도 라구사는 오늘날 두브로브니크에 해당한다. 15, 16세기에는 해상무역으로 번영을 누렸으나 나폴레옹

정복활동으로 1808년에 멸망하였다.

총 인구는 3만명가량이었으며, 그중 약 5000명이 라구사 시를 둘러싼 방벽안에 살았다.

- 위키백과 인용

 

* 두브로브니크 지도(투어팁스)

 

시차적응을 잘 했다고 생각하지만 역시나 아닌가 보다.

새벽 4시에 여지 없이 눈이 떠지고 말았다.

침대에서 비몽 사몽 뒹굴다가 6시에 일어났다.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왔는데 밤새 비가 왔나보다.

오늘 날이 좋아야 할텐데.

 

호텔 나와서 오른쪽편에 주유소가 하나 있는데, 나중에 같은 여행팀 한 분한테 들은 바로는 저 주유소에 24시간

운영하는 마트가 있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마트에 갈 일이 없었지만.

 

호텔 나와서 왼쪽편은 바닷가 마을이지만 너무 어두워서 바다가 잘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좀 흐르니 날이 점점 밝아져서 바닷가 마을과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잠시 산책을 해 보았는데 가까이에 있는 식당?은 영업을 하지 않는 분위기다.

이런 비수기에 관광 하는 사람은 한국 사람 뿐 인 모양이다.

네움의 바닷 바람 한번 쐬고 가족들을 불러 기념 사진 한장씩 찍고 조식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 보스니아는 약 20km 정도의 해안만을 가지고 있다.

위 사진에 보이는 바다가 바로 보스니아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바닷가 인 것이다.

잠시 보스니아의 슬픈 역사까지 떠올라 맘이 착잡해졌다.

 

조식은 종류는 많지 않았지만 역시나 빵 맛이 좋아서 나는 즐거운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호텔 1층에 작은 가게가 하나 있어서 기념품이라도 하나 사 볼까 하고 들어가 보았는데 조잡한 기념품 뿐이었다.

그래도 내가 보스니아에 언제 올 지 모른다는 생각에 냉장고 자석 두개 구입하는걸로 보스니아에서의

첫 쇼핑을 하였다.(자석 두개에 6유로)

 

호텔 주변 바닷가 풍경을 한번 더 눈에 담고 7시 50분경 버스에 올랐다.

 

다시 보스니아-크로아티아 국경을 사뿐하게 통과 하였다.

 

두브로브니크 가는 길에 예쁜 강?이 보여서 한컷 찍어 보았다.

 

오전 9시경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렸다.(약 1시간 10분 소요)

조금 걸어서 필레 문 앞에 섰다.

필레문은 구시가로 들어가는 서쪽 문이다.

석조 다리와 필레 문 사이에는 나무 도개교가 놓여 있는데 출입을 통제하며 도시를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필레문 위에는 도시의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의 석상이 서 있는데, 손에는 구시가의 모형이 들려 있다.

 

필레 문으로 입장 할 줄 알았는데 필레 문이 공사 중이어서 그런지 필레 문 옆에 있는 저 작은 문으로 들어간다.

 

요기서 인솔자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다시 이동한다.

 

다시 이 문을 통과.

 

스트라둔 거리에 들어서자 마자 오른편에 보이는 오노프리오 분수는 안타깝게도 공사 중이었다.

 

* 오노프리오 분수

1438년 도시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수도 사업이 시행되었고 구시가에서 12km 떨어진 리예카 두브로바츠카

사이에 크로아티아 최초의 수로가 놓였다.

수로가 놓이고 마을에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오노프리오 분수가 설치 되었는데 나폴리 출신의 건축가 오노프리오

델라 카바의 작품이다.

동물, 사람의 입을 표현한 16개의 수도 꼭지는 현재 새로운 수도로 연결 되어 있고 몇개의 수도에서만 물이 나온다.

 

16개 중의 하나의 수도꼭지를 겨우 찍어 봤는데 하필이면 손상이 많이 된 수도 꼭지 였다.

 

왼쪽편 첫번째 건물은 성 사비오르 성당.

이 건물이 가장 오래된 온전한 건물이라고 한다.

 

* 성 사비오르 성당

두브로브니크를 대표하는 르네상스 건축물로서 1520년 발생한 지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성 사비오르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147년 후 수천명의 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도 이 성당 만큼은 그 피해를

면했다고 한다.

현재 구시가지에서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몇 안되는 대표 건축물이다.

 

 

성 사비오르 성당 바로 옆 건물은 프란체스코 수도원.

 

* 프란체스코 수도원

1317년 세워진 이 수도원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을 혼재하고 있으며 지진 이후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 되었다.

수도원은 원래 성벽 바깥의 서쪽 지역에 있었으나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지금의 자리로 이동했다.

수도원과 성 사비오르 성당 옆의 좁은 골목으로는 박물관과 연결된다.

회랑이 작은 안뜰을 둘러싸고 있고 회랑에는 프레스코화가 가득하다.

내부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1317년 문을 연 약국이다.

 

* 수도원 벽에 튀어나온 고양이 얼굴을 한 돌을 디뎌서 떨어지지 않고 한바퀴 돌면 영리해진다고 한다.

실제로 해 보는 분이 있었는데 가서 직접 저 구조물을 보니 절대로 성공 할 수 없는 폭이었다.

 

이것이 바로 스트라둔 거리(= 플라차 거리)

여행 전에 이 거리가 꽤 큰 거리인줄 알았는데 막상 와 보니 저 끝 종탑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정도의 짧은 거리 였다.

반들 반들한 우윳빛 대리석을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 스트라둔 거리

서쪽의 필레문에서부터 동쪽의 구항구까지 이어지는 거리로 두브로브니크 최대의 번화가이자 보행자 거리다.

시원하게 뻗은 280m의 대리석 바닥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표면이 닳게 되자 반질 반질해졌다.

거리의 양옆의 단조로운 건물들은 1667년 두브로브니크 대지진이 있기 전까지는 무척 화려했지만 지진 발생 후

구시가를재빨리 재정비해야 했기 때문에 비슷비슷한 통일성 있는 건물들이 들어섰다고 한다.

 

1667년 대지진으로 많은 조각상이나 부조가 손상을 입을 때도 수도원 입구 위쪽의 1498년 페트로비츠 형제의

조각상 피에타 만큼은 훼손되지 않았다고 한다.

돌의 문의 성모 그림이나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피에타 조각 같은 것이 화재나 지진의 피해를 피해 가는 것을 보면

정말 초자연적인 힘이 작용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수기, 더군다나 아침이라서 누릴수 있는 이 한적한 스트라둔 거리를 걷는 것 만으로도 너무나 흥분되는 일이다.

 

거리 양편의 작은 골목이 좁아서 더 아름답다.

 

스트라둔 거리를 걷는 것은 바로 중세로 떠나는 여행이다.

 

스트라둔 거리.

이곳은 예전에 운하 였던 곳을 도시 확장 사업에 따라 메워 도로로 만든 곳이다.

성을 축조할 당시 엄청나게 많은 돌을 조달하기 위해 도시 밖에 있는 사람들이 성으로 들어올 때 그 지역의

좋은 돌을 가져와 통행료로 냈다고 한다.

이 거리를 중심으로 세로 11개, 가로 14개의 골목을 따라 로마와 르네상스 시대 양식의 건물들이 조화롭게 도시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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